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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카테고리
“구름이 애써 전하는 말 그 사람은 널 잊었다. 살아서 맺은 사람의 연 실낱같아 부질없다.” 바람이 찼다.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일찍 물든 단풍잎이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여름은 짓궂을 만큼 힘겹고 느리게 지나갔으나, 그럼에도 끝은 왔다. 클로에는 비취반지 성에 찾아온 계절의 경계에 서서 여름을 추억했다. 상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그녀를 채운 것은 상실감이었다. 잃어버렸다는, 흔들리지 않는 사실.
아르님 공작부인의 생일 파티는 소위 말하는 ‘성공적인’ 파티였다. 파티 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녀는 부쩍 건강해졌고 말수가 늘었으며 누구 앞에서든 자주 웃었다. 광기어린 천재의 핏줄, 그에 따른 수많은 소문에 오르내려야 했던 아르님의 성이 비로소 그녀를 놓아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을 클로에의 덕으로 돌렸다. 행복을 가져다준 아리땁고 총명한 며느리. 그것이 클로에에게 맡겨진 지위였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조슈아의 누이가 맡았던 자리와도 비슷했다. 행복의 상징이 되는 것.
그 정도쯤,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조슈아 폰 아르님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당신을 선택한 겁니다, 하고. 어려움은 언제나 삶의 다른 쪽에 존재했다.
―아마란스 백작가는 아르님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참석하지 못했다는 쪽이 더 옳을 것이다. 아마란스라는 이름은 이제 마구간의 지푸라기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파티장의 귀족들은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꺼려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녀가 속한 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린 것이었다. 직접 목격한 공화파의 파멸이었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나―하고, 클로에는 스스로에게 자문하듯 중얼거렸다. 발아래 붉은 잎이 생기 없이 바스러졌다. 그녀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것과 꼭 닮은 붉은 빛을 기억해냈다. 그녀의 걸음이 망설이듯 주춤했다가, 이내 빠르게 정원을 돌아나갔다.
* * *
“공개 집행이라지?”
조금만 깎아주세요, 하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던 리체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네? 뭐가요? 남자는 정확히 받은 돈만큼의 치즈를 잘라내며 혼잣말처럼 이어갔다. 멀뚱히 선 리체와는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는 채였다.
“어디 무슨 귀족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더니. 우리처럼 못 가진 사람들은 죽을 때도 구경거리로구먼.”
그는 리체로부터 대꾸를 바라지 않는지, 그것으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치즈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 감사합니다. 그녀의 인사에도 남자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우리처럼 못 가진 사람들은…하는 목소리가 유독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그 말은 지난밤 조슈아가 꺼낸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리체,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그가 찾아온 것은 해가 다 저문 뒤였다. 결혼한 몸이 또 무슨 일로, 라며 톡 쏘아주려던 그녀를 조슈아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처럼. 그렇지만, 그렇게나 강하게 끌어안았음에도, 어쩐지 안아주는 쪽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포옹이었다. 그녀의 품에서 무너져버렸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아무 말도 묻지 못하고 그저 등을 토닥여주었었다, 아침이 오고, 그가 다시 떠날 때까지. 무엇이 그를 힘들게 했을까.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답하듯이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리체가 돌아오길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묘하게 지쳐 보였다.
“클라리체 아브릴 양?”
그리고 리체는, 그럼에도 당당하고 아름다운 한 여자를 알고 있었다.
“…클로에 아가씨?” “…….” “…아.”
아르님 소공작의 아내를 아가씨라고 불러버린 리체가 지레 놀라며 입을 막았으나, 클로에는 그저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조슈아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푸른 시선이었다. 맑지만, 텅 비었고, 아프고, 그런데도 견디고 있지. 예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던 그의 말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꼭 그런 눈이었다.
클로에를 집 안으로 들이고, 리체는 그녀가 방문한 목적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조슈아가 그녀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를 찾으러 온 것일까. 조슈아와 자신의 관계 정도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공작께선 아침 일찍 돌아오셨어요.”
그런 이유가 아니다, 라고. 클로에는 리체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을 꺼냈다. 오만도 겸손도 아닌, 사실 그 자체만을 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리체는 조금 클로에를 알 것 같아졌다.
“저기… 조슈아는 아가씨를 무척 아끼고 있어요.”
클로에의 소공작과 리체의 조슈아는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전혀 동떨어진 존재로 느껴졌다. 아끼고 있어요. 그 말은 억지로 갖다 맞춘 조각처럼 삐걱거렸다. …그렇다면 그도. 가만히 말을 꺼내는 클로에는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그도 조금은 망설이고 있었을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소문은 들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빨리 퍼지죠.”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래도록 마주쳤다.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던 클로에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는 것을, 리체는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지난밤 한숨처럼 내뱉어진 조슈아의 한 마디를 기억했다. 리체,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모두가 그 사람의 죽음을 바라요.”
흩어진 퍼즐처럼 알 수 없던 그 말이 그제야 이해됐다. 그 사람. 조슈아를 비롯한 귀족들의 결정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될 그 사람. 클로에의 긴 속눈썹은 떨지 않아도 떨리고 있었다. 조슈아가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저 곧은 눈동자가 무너져 내릴 것이 두려워서.
“…조슈아도,”
하지만 조슈아, 그렇지만 말야.
“조슈아도 많이 힘들어했어요.”
지금의 나는 그녀만큼이나 슬퍼. 내 눈앞의 그녀만큼이나.
“어제 조슈아가 저를 찾아온 건,”
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그녀를 끌어안고 울었어야지.
“아가씨를 볼 면목이 없어서에요.”
…그랬어야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 클로에와 란지에, 조슈아. 아픈 인연의 중심에는 분명 세 사람이 있지만. 리체 역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겠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가 입게 될 상처 때문에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요...
*머리말에 쓰인 글은 김윤아-야상곡 가사의 일부입니다.
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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